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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계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무등산 타잔 박흥숙의 살인 이유

by 책의비밀 2021. 12. 15.

 

무등산 타잔 박흥숙을 들어보셨나요? 사자랑 싸워서 이기는 괴력의 소유자인 타잔을 빗대어 생긴 별명이지만 그는 살인마 입니다. 무등산 타잔은 무등산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소영웅으로 착각하고 무서운 것 없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등산 타잔 박흥숙은 왜 살인을 했을까요?

 

이 책은 SBS TV 프로그램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여러 에피소드를 엮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의 이야기를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 씨 세명이 이야기 친구에게 1:1로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고나니 사건 중에서 그냥 '아 그렇구나'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이면에 숨겨진 교훈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충격적인 행동 뒤에는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 자신의 삶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분위기, 그리고 가해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몰고 가는 것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를 읽는 재미에 흥미를 느끼기 위해 만들어진 책입니다. 여섯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언어로 대화를 듣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그 중 2개의 에피소드를 선택하여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역사의 순간과 그때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궁지에 몰려 살인을 하게 만든 희대의 살인마 박흥숙

 

우리가 알고있는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이춘재 등)들은 주로 자신보다 약한 여성이나 노인을 상대로 했습니다.

 

범행을 저지르고,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하면서 완전 범죄를 노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박흥숙은 앞서 언급한 살인마들과 다르게 대낮에 뻥 뚫린

야외에서 건장한 체격의 성인 남성 네 명을

쇠망치로 내리쳐 살해했습니다.

 

사전에 범행을 계획한 것도 아니고

시신을 은닉할 시도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학교도 안 다녔고 직업도 없이 외롭게 산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산 타기의 명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무등산 십팔기'를 정립할 계획이었다고 합니다.

 

공인되진 않았지만 태권도 4단, 유도 3단의 실력이 있었고 무당촌을 근거지로

강도 높은 수련을 해온 인간병기였다고 합니다.

 

그럼 그는 왜 사람들을 살인한 것일까요?

전남 영광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형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했지만 가세가 기울어서 그는 개천에서 용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그는 가난한 집안의 똑똑하고

책임감 강한 아이였다고 합니다.

 

중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으나 수업료를 낼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는 먹고살 것이 없어서 열쇠 수리공으로 취업을 했다고 합니다. 일자리는 구했지만 집이 없어서 무등산 중턱까지 올라서 가족들위해 직접 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여동생, 남동생, 외할머니가 살 집을 짓고 자기 공부방을 만들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법시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돈 없고 백 없어도 법전이랑 연필 살 돈 그리고 끈기만 있으면 열리는 출세의 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루에 20시간씩 공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77년 4월 20일, 박흥숙은 점심을 먹고 난 후 며칠 동안 새 공부방을

짓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시각 김씨를 포함한 구청 직원들은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망치를 들고 박흥숙의 집을 철거하러

왔다고 합니다.

박흥숙의 가족들은 철거반원들이 조만간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박흥숙은 그래서 집근처에 진짜 땅굴을 파고 있었다고 합니다. 철거반원들 입장에서는 이미 경고장을 보냈는데 사람들이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갑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단 법대로 공부 집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공무원 한명이 "불 질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철거반원들은 박흥숙 집 뿐만 아니라 아픈 노인들이 살고 있는 움막들도 불태웠다고 합니다. 이때 흥분한 박흥숙이 망치를 휘둘렀고 머리를 맞은 철거반원 네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은 중태에 빠졌다가 겨

우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이 프로그램을 준비한

홍정아 작가는 이렇게 글을 씁니다.

 

우리 사회가 철거하고 있던 건

집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들의 피눈물로 반죽한 시멘트를 발라

그들의 절망만큼 높이 쌓아 올린 콘크리트 건물

그것이 지난 50년 동안

우리 모두가 내 것이 되기를 꿈꾸었던

서울의 아파트다

 

과연 박흥숙은 살인마 이전에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27살에 사형 집행 전에

작성한 최후 진술서입니다.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되어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라.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고 해도 좋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몸으로써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것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의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는 말인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그들을 보라, 불쌍하지도 가엾지도 않단 말인가.

 

 

 

가혹했던 과거 여성 인권과 박인수

 

1955년 봄 20대 해군 대위가 여성들을 농락하고 있다는 첩보가 검찰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26살의 그는 소문대로 문어발식 연애를 했다고 합니다. 상대 여성들은 모두 '박인수'라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고 생각했고

잠자리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군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탈영으로 불명예제대를 했고 여자들을 만날 때는 예전 신분증을 보여 줬다고 합니다.

 

피해자는 30명인데 실제로는

7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는 춤을 잘 췄다고 합니다. 대부분 댄스홀에서 여성을 만나 사교댄스 실력으로 여성들에게 어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재판에서 혼인빙자간음혐의를 부인했다고 합니다 "결혼을 약속한 적 없고 여자들이 제 발로 따라왔다. 댄스홀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는 으레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

 

이어진 그의 발언이 훨씬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내가 만난 여성들 중 처녀는

미용사 한 명뿐이었다"

 

결국 그의 주장은 내가 만난 여자들은 한 명 빼고 전부 문란했기 때문에 혼인빙자간음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문들은 앞다퉈 여성들의 자성과 각성을 요구하는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파인수와 만난 여대생은 풍기 문란을 이유로 학교에서 제적되었고 고소했던 여자들은 고소를 취하했다고 합니다.

 

재판부는 박인수에게 혼인빙자간음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해군 대위라고 사칭한 부분만 공문서 부정 행사 혐의로 유죄를 인정하여 벌금 쌀한가마 비용 수준으로 선고했다고 합니다.

피해자들의 진술만으로 혼인빙자간음죄를 인정할 증거가 부족했다고 합니다.

 

결혼하자는 말에 속에서 피의자와 성관계를 맺었다기보다는, 피해자들 스스로 선택한 행동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재판부는 정조라는 것은 여성에 있어서 생명과도 같지만 그 정조의 기준을 '댄스홀'출입 여부로 판단을 했다고 합니다.

 

댄스홀의 출입 여부에 따라 보호해야 할 정조와 보호받지 않은 정조가 생긴 것입니다.

 

그럼 댄스홀이 어떤 곳이었을까요?

 

우리나라는 해방되고 나서

미국 문화가 자연스럽게 유입되었습니다.

당시 '미제라는 양잿물도 마신다'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였는데 파트너와 댄스를 추는

사교댄스가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영화 '자유부인'이라는 영화가 인기가 최고였다고 합니다. 줄거리는 대학교수 부인인 오선영은

결혼 이후 집에 세 들어 사는 젊은 남자로부터 춤을 배우면서 다른 남자와 어울리며 연애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자유부인'영화는 가정주부에게 해방구이면서 자유를 갈망하는 신문화를 즐기는

공간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이었는데 소설이 나온 것이 1954년이고 박인수 사건은 1955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댄스홀은 사실 풍기문란을 조장하는 문란한 여성으로 지탄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가해자인 박인수 보다 법은 정숙한 여인의 정조만을 보호한다라는 남성

사회의 권력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마누라와 북어는 사흘에 한 번씩 두들겨 패야 한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겪어야 하는 고통은 집 안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매 맞는 아내가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고 합니다.

 

가정폭력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 생겨도 이웃들은 남의 집 가정사에는 함부로

끼어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신고를 했어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식의 한가로운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1992년에 형사정책연구원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결혼 후 남편에게 구타를

당한 주부가 45.8%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남편은 아내를 때렸을까요? 남편들에게 물어봤더니 가장 큰 이유가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폭력을 복종의 도구를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사적인 공간이므로 은폐하기 쉽고, 피해자도 자신의 신고로 가정이 파탄 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용기 내어 신고를 한다고 하더라도 처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근대에 이르러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를 발견하고 사람들은 남성우월주의는 사라져야 할 잘못된 가치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제의 폐습은 우리 사회 구족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채 관념으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책의비밀 -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리뷰/서평/감상/요약으로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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